인간은 취약하고 의존적인 존재다. 태어날 때부터 영·유아기 때, 병약할 때, 고령으로 노쇠해질 때, 마지막 죽음에 이를 때까지 돌봄(caring)이 필요한 존재다. 육신의 돌봄뿐 아니라 정서적, 영적인 돌봄도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평생 동안 돌봄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현재의 시류와 사회, 정치는 돌봄과 돌봄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돌봄을 뜻하는 영어 단어 care는 보살핌, 관심, 걱정, 슬픔, 애통, 곤경을 의미하는 고대 영어 caru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요구와 취약함을 온전하게 돌보는 것이 어렵고 힘들며, 지치는 일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로 유아나 사고로 인한 중환자, 거동이 어려운 노인환자의 음식 수발과 목욕, 용변을 치워주는 일과 같은 돌봄은 정성이 깃든 보살핌과 육체적 노동의 수고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세계 각국의 주류 남성들은 인간의 근원적 취약성을 외면하고 강한 남성성을 숭배하며, 돌봄을 노고가 필요한 궂은 일, 허드렛일로 치부한다. 돌봄을 가족 또는 사적인 개인책임의 문제로 규정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자(계급, 인종, 성)의 몫으로 돌린다. 또한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돌봄의 복잡성을 무시하고, 돌봄을 시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서비스 상품’의 하나로 취급해왔다. 이에 따라 주로 가정 내 여성과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 또는 사회적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고단한 돌봄노동을 떠맡아왔다. 반면에 사회적으로 힘이 있는 사람들은 돌봄노동의 책임을 당당하게 면제받는다. 공적으로 돌보는 일(국방, 치안, 소방 등)을 하고 있거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생산적인 일(근무)을 하기 때문이란 이유를 면죄부로 제시한다.
돌봄의 불평등과 불균형이 심화되고 장기화되면서 돌봄위기가 발생한다. 공공재로서의 돌봄자원과 돌봄역량이 훼손되면서 돌봄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한 돌봄이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 돌봄이 없는 사회는 무관심(carelessness)이 지배하는 곳이다. 누군가가 돌봄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들이 희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춘다. 이것이 가장 큰 위기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는 수익창출과 효율성이 최우선의 가치다. 육아와 간병은 물론 반려동물 돌봄까지 플랫폼 기반의 돌봄사업 아이템이 된다. 개인의 안녕(wellbeing)은 전적으로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입시킨다. 공동체는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밟히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밟아야 하는 경쟁지상주의와 승자독식이 지배하는 각자도생의 사회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사회 시스템을 통해 이득을 얻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차리는 것이다.
조안 C. 트론토(Joan C. Tronto) 등의 정치학자는 돌봄이 진정한 민주주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현재, 돌봄이 불평등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사회의 구성원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서로를 평등하게 대우한다는 것은 구성원 누구도 차별받거나 배제되지 않고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민주주의 발전은 시민권의 확대 과정이었다. 귀족과 특권 계급만이 지녔던 시민권의 범위를 자본가, 노동자, 흑인, 여성 등 차별과 배제를 받던 사람들까지 넓혀나간 것이 서구 민주주의의 역사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제헌헌법을 통해 모든 국민이 시민권을 일괄적으로 부여받았다.
‘돌봄 민주주의(Caring Democracy)’란 돌봄책임의 공정한 분담을 민주주의의 핵심 의제로 삼는 것이라고 트론토는 강조한다. 더 정의롭고 포용적인 민주주의를 위해 돌봄을 주고받는 것이 시혜나 의존이 아니며, 구성원 모두의 책임과 권리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집안의 가장이거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로 돌봄책임에서 무임승차하고 있는 남성성의 권리를 철회하고, 돌봄책임에서의 차별과 배제, 돌봄 노동자의 처우 문제 그리고 돌봄의 시장화 축소 등을 깊이 논의해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돌봄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이 인간의 취약성과 연결성을 인정하고 개인의 능력이나 환경에 상관없이 상호 간에 돌봄과 지원을 제공하여 함께 돌보는 사회를 말한다. 돌봄사회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소외되지 않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중받으며, 모든 구성원들이 건강하고 안정하게 살아 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삶의 질을 높인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성인들이 협력적 경쟁으로 일을 하며, 노인들이 존중받는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돕고 함께 살아감으로써 사회통합이 이뤄진다.
돌봄이 부족해지면 사람은 거칠어지고 사회는 냉랭해진다. 돌봄결핍(caring deficit)은 우리 사회의 위기 원인을 잘 나타낸 용어다. 한국사회의 가장 커다란 문제로 꼽히는 저출생, 고령화의 밑바닥에 돌봄결핍의 문제가 있다. 돌봄이 결핍된 사회에서 여성에게 아이를 낳아 건강하게 양육하는 돌봄책임의 독박을 쓰라고 강요하면 저출생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치매에 걸린 부모나 이웃을 돌봐야 하는 가혹한 돌봄노동의 책임을 누구에게 떠넘기고 있는가? 궁극적으로 돌봄 문제다. 돌봄사회로 바뀌어야 각자도생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에 나타나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신 뒤 “내 양들을 잘 돌보라”고 세 번 당부하셨다(공동번역 요한복음 21:15~17). 한국 교회가 교회 내의 돌봄뿐 아니라 기후붕괴 시대를 맞아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태계의 돌봄부터 개인과 가정, 사회의 돌봄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우리나라는 내년(2025년)부터 전체 인구의 20%가 65세 이상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하여, 돌봄이 필요한 노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정부가 의료 · 돌봄 · 요양 · 주거 등을 함께 제공하는 ‘통합돌봄 지원법’을 제정하고 2026년 3월부터 시행할 계획이지만, 그 준비가 매우 미흡한 상황이다. 한국 교회가 돌봄사역에 앞장서야 할 때다.
*월간 <새문안>(424호) 2024년 11월호에 실린 글이며, 새문안웹진(http://webzine.saemoonan.org)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